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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종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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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cutting Date : 2003/12/01  Hit : 4776  Recommend : 1101   
 여름날의 필수 악세서리, 부채

추억 속의 종이를 찾아서... ④

여름날의 필수 악세사리, 부채

‘하루만 맡겨도 높은 이자를 지급해 준다’거나 ‘각종의 위험대비를 저희 OO보험과 함께’라는 글귀가 새겨진 은행이나 보험회사의 판촉용으로 자주 애용되는 플라스틱 부채 한두 개쯤은 여름철에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공짜 제품이다. 디자인도 또한 다양하고 색채도 세련되어서 ‘갖고 다닐 만한’ 제품들이 대부분이다. 비좁은 지하철에서는 가끔씩,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 모시는 이 제품은’ 이라면서 판매되는 소형의 작은 부채도 보통 한 개에 천 원 정도 하지만 한여름을 나기엔 역시 별 무리가 없다.

부채라는 뜻의 한자(漢字) ‘선(扇)’은 집이나 문을 뜻하는 ‘호(戶)’자에 날개를 뜻하는 깃‘우(羽)’자를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이는 곧 집안에 있는 날개란 뜻이고, 날개로 엮은 문짝이란 뜻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는 지금까지도 그 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약 3,000년 전에 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이집트 투탄카멘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황금봉에 타조의 깃털을 붙인 것’이라고 전해진다.

각종 문헌이나 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는 4세기 이전부터 부채가 존재했으며, 경남 의창에서 출토된 옻칠이 된 부채 다리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이라고 나와 있다. 또한 고려말부터 조선중기 후반까지 부채 공예가 활발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 발명된 접는 부채는 중국에서 매우 귀한 특산품으로 여겨졌고, 조선시대에는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고 부채를 만들어 왕실에 진상하였다고 하며, 또한 일본이나 중국에 본격적으로 수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채의 종류는 구별하는 방법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보아 ‘방구부채’와 ‘접부채’로 나눌 수 있다. 방구부채란 부채살에 갑사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형태의 부채이고, 접부채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형태의 것이다. 방구부채에는 부채살의 끝을 휘어 오동나무잎 모양으로 만든 ‘오엽선’과 연잎의 연맥모양과 비슷하게 만든 ‘연엽선’, 부채의 모양을 파초잎 모양으로 만든 ‘파초선’, 그리고 중앙에 태극모양을 넣어서 만든 ‘태극선’ 등이 유명하다.
왕골, 갯버들, 죽순껍질, 등넝쿨 등으로 얽어 만든 ‘팔덕선’은 싸고, 만들기 쉽고, 파손의 염려가 적으며, 앉을 땐 방석으로도 되고 해가리개도 되며, 여름철에 의복 속에 넣으면 등의 대용도 되는 여덟 가지의 이덕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방구부채이다. 접부채는 대나무 겉피만 두 개를 맞붙여 속살을 합죽하여 만드는 것으로 주로 ‘합죽선’이라고도 하며 부채의 머리부분이나 갓대의 재료에 따라 또는 끝처리나 크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현재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대나무와 한지로 고려시대 때부터 만들었다는 합죽선이 특히 전주지방에서 주로 생산되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합죽선의 주재료인 양질의 대나무가 주로 전남 담양 구례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를 베는 시기는 주로 음력 7월 15일, 백중절 전후의 1개월과 9월 그믐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벌레가 슬지 않고 질이 좋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합죽선을 만드는 대략의 방법은 먼저, 부채의 뼈와 살을 만드는 골선 작업을 수행하고, 도배할 선지를 부채의 형태로 오려서 이곳에 그림이나 글씨를 써넣고 풀을 먹인 후 이를 다듬어서 완성한다. 특히, 부채고리에 매어 다는 장식품을 ‘선추’(또는 선초)라고 했는데 주로 양반들이 사용했고 일반 서민들은 달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명주끈을 고리에 매달아 분실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로 처음 사용되었는데 점차 사치품으로 여겨져 금, 은, 주옥, 비취, 호박 등의 보석류로 장식하게 되면서부터 부채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부채는 가끔 술상에 놓인 파리를 쫓는 용도 이외에 선물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수행했는데, ‘동국세시기’에 보면 ‘단오날에는 공조에서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였고 재상은 물론 말직의 궁인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채를 생산하는 각 고을의 수령들도 이와 같이 궁중에 진상하고 서울 각처에 선사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단오날 왕이 하사하기 위해 부채 생산지에 명하여 궁중에 바치는 부채를 만들게 하였고 이것을 ‘단오 진선’이라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더위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의 선물로 부채만한게 없었던 시절의 아름다운 일로써 조선말기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빛나는 세시풍속이었던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부채의 또 하나의 역할은 판소리와의 어울림이다. 부채는 명창과의 뗄 수 없는 호흡으로 명창의 ‘기(氣)’를 끌어올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로는 절절하게 때로는 호통으로 부채를 쥐었다 폈다 하며 또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툭툭 치며 고수와의 박자를 맞추는 장면은 부채만이 가진 또다른 매력인 것이다. 만일 ‘춘향이가 어사또를 알현하는 절대 절명의 마당에’ 명창이 부채 대신 손에 파리채나 곤봉 따위를 들고 ‘창’을 한다면 몹시 어색하고 우스운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부채는 자연과도 관계가 깊다.

냉매가 섞이지 않은 바람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그러하려니와 은행잎으로 흔히 표현되는 부채꼴 모양의 모습도 대부분의 잎사귀와 닮아 있다. 어쩌면 부채의 발명도 잎사귀를 본뜬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한 여름이 되면 항상 부채를 만들어 주시던 분이 계셨다. 요소, 복합, 질소 따위의 글이 써진 비료포대로 만드는 것인데, 비료포대를 주름 매겨서 휘어잡고 그 사이에 막대를 끼워 넣어 부채다리를 만들고 그 다리를 주로 노끈으로 칭칭 감아서 완성하는 식이었다. 부채가 흔치 않던 시절에 ‘비료포대 부채’는 아주 훌륭한 여름의 동반자였다. 그 아저씨는 마을 분들이 수공비로 가져온 막걸리를 드시며 몹시 능숙한 솜씨로 부채를 만들었기에 우리 동네는 물론 옆 마을의 비료포대는 항상 남아나질 않았다. 그 분의 수고로 부채는 우리 동네 대부분의 집에 안티푸라민과 함께 집안의 상비품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대체로 여늬 것보다 크게 만들어지던 비료포대 부채는 다양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는데 당시 마을에 한 두대 있던 흑백 텔레비젼을 보러 가던 손길에도 들려 있었고, 모깃불 놓은 마당에 꺼져가던 불길을 되살리기에도 아주 제격이었다.
초저녁 어스름엔 멍석 위에서 한낮의 고된 일과를 끝내고 벌어지던 동네 아저씨들의 술판 위에 얼쩡대던 모기나 파리들에게 부채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부채가 공포스럽기는 삼장법사를 모시고 길 떠나는 손오공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멀고 험한 길에 만나는 괴물들은 대체로 규모가 큰 ‘파초선’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위력이 대단하여 부채를 한번 휘두르면 일어나는 광풍에 삼장법사 일행은 매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부채가 필살기로 쓰일 줄은 차마 아무도 예견치 못한 일로서 부채의 또다른 용도 확장성을 엿보게 한다.

다양한 제작방법이 동원되어 만들어지는 부채는 전통 공예품 목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비록 현재는 플라스틱이 주류를 이루고 사용이 점차 줄어들기는 하지만 엄연히 전통 공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실용적인 용도 이외의 장식용품으로 제작되기도 하며 웬만한 기념품 가게의 매장에 올라있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또한 고풍스런 찻집의 인테리어에서는 거의 빼놓지 않고 장식용 대형 부채들이 등장하는데 어떤 종류의 벽면에도 대부분 완벽하게 호환되는 것은 부채가 지닌 또다른 매력이다.

부채는 시원한 흰 모시적삼을 단정하게 입고 다니시는 노인분들의 모습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아마도 부채에는 어렵게 살아왔던 세월들을 함께 지내온 잊을 수 없는 연민의 정이 간곡히 스며있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날이 더워도 방정맞게 부채질 하지 않고 함부로 웃옷을 벗어던지지 않던 선조들의 멋은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문화의 한 장면이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하여 부채의 수요가 급증할 기미는 아직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전통문화의 유산인 부채에 스며있는 조상들의 멋스런운 삶과 여유를 한번씩 되새겨 보는 것도 몹시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무더운 여름에 좀 고풍스런 부채를 하나씩 구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먹고살기 바쁜’ 요즘 사람들에게 부채로 부쳐서 일으키는 바람을 한번쯤 냉매제가 섞여 나오는 바람과
비교하며 삶의 여유를 느껴보는 일은 정말 ‘먹고 살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걸까.

부채로 원하는 바람을 얼마나 얻겠고 또 얼마나 만족할 수 있으랴. 다만 부채를 한번쯤 자세히 살펴보며 삶을 조용히 반추하거나 미래를 계획할 수만 있다면 한 여름에 떠나는 피서 못지 않게 유익한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부채를 구입해서 사용할 때 파리채, 필살기, 판소리의 용도로 사용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용도로 쓰여지면 절대로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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